출발점에서는 지하철 출구보다 시간을 먼저 고른다
평일 오후 일찍 을지로3가역에서 출발하는 편이 좋다. 주말이나 늦은 밤에는 인쇄소와 금속 가공점의 셔터가 내려가 있어, 방문자는 오래된 외관만 보고 이곳을 ‘멈춘 동네’로 오해하기 쉽다. 출구를 나서면 목적지를 향해 곧장 걷지 말고 납품 오토바이, 종이 묶음, 금속 자재가 오가는 골목의 속도를 먼저 살핀다. 보도가 좁고 작업 차량이 수시로 드나들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때도 출입구와 운반 동선을 막지 않는다. 을지로 여행의 첫 규칙은 멋진 장면을 찾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터에 들어왔음을 알아차리는 것이다.
인쇄골목에서는 주문 한 건의 이동을 상상한다
을지로3가와 충무로 사이 인현동 일대에는 기획, 디자인, 출력, 제판, 인쇄, 코팅, 재단과 제본을 나누어 맡는 소규모 업체가 밀집해 있다. 서울시는 2021년 세운맵에 이 일대 약 1,100개 인쇄업체 정보를 추가하며 이런 분업 구조를 소개했다. 한 건물 안에서 모든 공정이 끝나는 대형 공장과 달리, 이곳에서는 주문이 골목을 건너 다음 기술자에게 전달된다. 열린 작업장 안을 허락 없이 촬영하거나 종이를 만지지 말고, 간판에 적힌 ‘제판·박·도무송·귀도리’ 같은 단어를 읽어본다. 여행자가 보는 낡은 간판은 실제 주문자가 찾는 기술의 목록이다.
세운상가에서는 위와 아래를 함께 본다
청계천을 건너 세운상가에 도착하면 먼저 아래층 전자·부품 상가를 보고, 공개된 계단과 보행 공간으로 올라간다. 서울기록원은 세운상가를 1968년에 만들어진 약 1킬로미터 길이의 국내 최초 주상복합 상가군으로 설명한다. 건물 위에서는 종묘와 남산 방향의 도심 축이 보이지만, 전망만 보고 내려오면 절반만 본 셈이다. 아래에는 수리와 부품 조달의 시간이, 위에는 당시 서울이 꿈꾼 입체도시의 구상이 남아 있다. 개방 구간은 공사와 관리 상황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므로 현장 안내를 따른다.
마지막은 노가리골목이나 조명상가 중 하나를 고른다
해가 질 무렵에는 두 가지 결말이 가능하다. 을지로3가 쪽 노가리골목으로 돌아가면 1980년대 직장인의 퇴근 문화가 어떻게 서울미래유산이 되었는지 볼 수 있다. 을지로4가 방향 조명상가로 가면 낮에는 부품처럼 보이던 등기구가 진열창 속 빛의 풍경으로 바뀐다. 영업시간과 야외 좌석 운영은 점포와 행정 상황에 따라 변하므로 옛 사진을 현재 모습으로 단정하지 않는다. 100분 동안 네 장소를 모두 소비하려 하기보다, 낮의 생산과 밤의 소비가 같은 골목을 서로 다르게 사용하는 장면을 확인하면 이 코스의 목적은 충분히 달성된다.
걷는 동안 지도 앱의 상호명만 따라가지 말고 도로명과 건물 번호를 함께 기록한다. 같은 이름의 가게가 이전하거나 지도 정보가 늦게 갱신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귀가할 때는 을지로3가역, 을지로4가역, 종로3가역 가운데 현재 위치와 가장 가까운 역을 선택하면 불필요하게 골목을 되돌아갈 필요가 없다.
동행자가 있다면 출발 전에 각자 보고 싶은 장면을 하나씩 정한다. 산업을 보고 싶은 사람과 식사를 원하는 사람이 같은 속도로 움직이지 않아도 된다. 약속한 종료 지점에서 다시 만나면 좁은 골목에서 무리하게 일행을 기다리며 통행을 막는 일도 줄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