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구를 해안선 한 점이 아니라 권역으로 막다
해미읍성은 바닷가에 붙은 수군성이 아니다. 고려 말부터 서해안에 잦았던 왜구의 침입에 대응하기 위해 덕산에 있던 충청병영을 해미로 옮기면서 1417년에 쌓기 시작해 1421년에 완성한 병영성이다. 배가 닿는 포구 하나를 감시하기보다 여러 고을과 육상 교통을 함께 지휘할 수 있는 평지를 선택한 셈이다. 성 안에는 충청 지역 육군을 지휘한 병마절도사가 머물렀고, 군사 명령과 행정이 함께 움직였다. 여행자는 성벽에서 바다를 찾기보다 서쪽으로 이어지는 내포의 들과 산줄기, 읍내로 모이는 길을 살펴야 입지의 뜻을 읽을 수 있다.
병영이 떠난 뒤 읍성으로 역할을 바꾸다
해미의 충청병영은 1651년 청주로 옮겨갔다. 그렇다고 성이 곧 버려진 것은 아니다. 해미현의 관아와 군사 기능이 남아 호서좌영이 내포 지역 여러 고을을 관할했다. 병영성에서 지방 행정과 치안을 맡는 읍성으로 무게가 옮겨간 것이다. 한 성곽 안에 동헌과 객사, 옥사, 창고와 민가가 들어섰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성은 전투 때만 쓰는 거대한 장벽이 아니라 평소 세금과 재판, 숙박과 군역이 처리되는 도시의 경계였다. 잔디밭이 넓은 오늘의 모습만 보면 비어 있는 공원처럼 보이지만, 조선시대에는 권한과 사람이 밀집한 공간이었다.
사라진 건물 위에 복원된 풍경을 구분하다
1910년 이후 성 안 시설이 철거되고 민가가 들어서면서 옛 공간 구성은 크게 흐트러졌다.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된 뒤 1973년부터 정비가 시작됐고, 1997년 이후 발굴을 거쳐 관아와 일부 시설을 복원했다. 따라서 지금 보는 성벽과 진남문, 발굴 뒤 다시 세운 건물을 모두 같은 시기의 원형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남아 있는 부분, 고쳐 쓴 부분, 조사 자료를 바탕으로 재현한 부분이 한 장소에 겹쳐 있다. 안내판의 건립·복원 연도를 함께 읽으면 해미읍성이 조선의 유적이면서 현대 사회가 선택해 정비한 역사공간이라는 사실도 보인다.
한 바퀴를 걸으며 안과 밖을 함께 보다
진남문으로 들어가 곧장 관아만 보고 돌아서지 말고 성벽 위나 안쪽 길을 따라 한 바퀴 걸어보는 편이 좋다. 바깥에는 시장과 주택, 학교와 도로가 성 가까이 붙어 있고 안쪽에는 잔디와 복원 건물이 넓게 놓인다. 높이가 있는 구간과 돌계단에서는 비나 서리 뒤 미끄럼을 조심하고, 통제 표지가 있으면 우회한다. 행사 무대나 체험 시설은 시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관찰은 성을 고립된 명소로 보는 것이 아니라, 군사 지휘소가 읍성이 되고 다시 주민의 생활권과 관광지가 된 긴 변화를 한 바퀴의 거리 안에서 확인하는 일이다.
걷기 어려운 동행이 있다면 성벽 위 완주를 목표로 삼지 않아도 된다. 진남문과 평탄한 성 안 길, 관아 주변만 연결해도 안팎의 관계를 충분히 볼 수 있다. 이동 범위를 줄이는 대신 문밖 도로와 성 안 건물의 방향을 지도에서 비교하면 방어와 행정의 연결을 놓치지 않는다. 역사공간을 이해하는 깊이는 걸은 거리보다 서로 다른 시간과 기능을 얼마나 정확히 구분했는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