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비도성 한가운데의 절
정림사지는 부소산성 남쪽, 궁남지 북쪽의 도성 중심축에 놓인 절터이다. 중문, 탑, 금당, 강당이 남북으로 이어지는 배치는 사비 왕경의 불교 사찰이 도시 공간에서 차지한 위치를 보여 준다. 지금은 건물보다 기단과 초석이 넓게 남아 있어 탑만 보고 돌아서기 쉽다. 입구에서 유적 전체의 축을 먼저 보고 석탑까지 걸으면 탑이 독립된 조형물이 아니라 사찰 동선의 중심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박물관의 모형과 야외의 실제 거리를 대조하면 사라진 목조건축의 규모도 더 정확히 상상할 수 있다.
돌로 번역한 목조건축
오층석탑은 목탑의 구조와 비례를 돌로 옮긴 백제 석탑의 대표 사례로 평가된다. 기둥처럼 표현한 모서리, 얇고 넓게 뻗은 지붕돌, 층이 올라갈수록 안정적으로 줄어드는 몸체가 무거운 돌을 가볍게 보이게 한다. 이를 단순히 “소박하다”거나 “일본 탑의 원형”이라고만 요약하면 백제가 중국의 불교 건축을 받아들이고 자기 기술로 바꾸어 동아시아에 영향을 준 복합적인 교류가 사라진다. 눈앞의 탑은 여러 차례 보존과 수리를 거친 현재의 문화유산이므로 모든 돌이 처음 놓인 상태 그대로라고 단정할 수도 없다.
소정방의 명문이 만든 두 번째 시간
백제가 멸망한 뒤 당 장수 소정방의 공적을 기록한 글이 탑 몸돌에 새겨졌다. 그래서 이 탑은 백제가 세운 종교 건축이면서 승자가 패망을 기념한 기록물이라는 두 시간을 함께 지닌다. 명문 때문에 탑을 ‘평제탑’ 같은 이름으로만 부르면 원래의 사찰과 건축적 의미가 정복자의 기록에 가려진다. 반대로 명문을 불편하다는 이유로 지우듯 설명하면 유산이 겪은 역사도 사라진다. 어느 면에 글이 있는지 확인하고, 탑의 조성 시기와 글이 새겨진 시기가 다르다는 점을 분명히 구분해야 한다.
한 장소에서 수도의 축을 잇기
정림사지에서는 북쪽 부소산과 남쪽 궁남지 방향을 지도에서 함께 확인하기 좋다. 도보로 이동할 때는 현대 도로와 상가가 사이에 놓이므로 백제 시대의 직선 축이 그대로 보존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야외 탑의 표면을 만지거나 기단 안쪽으로 들어가지 않고, 명문은 안내판과 전시 자료로 자세히 본다. 전시관 운영시간과 야외 관람 조건은 달라질 수 있다. 탑의 아름다움, 사찰의 도시적 위치, 패망 뒤 새겨진 글을 차례로 읽으면 정림사지는 백제의 전성기만 보여주는 곳이 아니라 한 도시의 건축이 권력 교체 뒤 어떻게 다른 의미를 얻는지 보여주는 장소가 된다.
낮에는 돌의 비례와 글씨가 또렷하고, 해가 기울면 사라진 회랑과 건물터의 넓이가 더 잘 느껴질 수 있다. 어느 시간에 보더라도 탑 한 점만 확대하기보다 남북 축을 한 번 왕복해야 사찰이 도성 한가운데에서 맡았던 규모와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
전시관의 배치 모형도 이 왕복 뒤에 보면 훨씬 구체적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