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바깥을 두른 큰 선
사비도성은 왕궁과 사찰, 산성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성은 부소산성에서 이어져 동쪽과 남쪽의 산과 평지를 두르며 도성 외곽을 조직한 성곽이다. 백제역사유적지구가 관북리 유적과 부소산성, 정림사지, 왕릉원과 함께 나성을 구성요소로 삼는 이유도 개별 건물보다 계획도시의 전체 구조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지도 위에서는 긴 선으로 보이지만 현장에서는 낮은 둔덕, 절개된 구간, 복원 성벽과 산길로 나뉘어 나타난다. 어느 한 지점의 모습만으로 나성 전체를 상상하지 않는 편이 좋다.
방어와 도시계획이 만나는 곳
성벽은 외부 공격을 늦추고 출입을 통제하는 군사시설이다. 동시에 문과 도로, 물길의 위치를 정해 도시의 이동을 조직한다. 나성 안쪽에는 왕궁과 사찰, 주거와 행정 공간이 있었고 바깥에는 왕릉, 농경지와 주변 마을이 연결되었다. 따라서 나성을 현대 도시의 행정구역 경계처럼 정확히 닫힌 선으로 이해하거나, 반대로 전쟁 때만 쓰는 시설로 한정하면 부족하다. 성벽의 높이와 축조 방식도 지형과 구간에 따라 달랐으며 조사 결과에 따라 해석이 보완될 수 있다.
보이는 벽과 땅속의 벽
일부 구간은 정비되어 형태를 쉽게 알아볼 수 있지만 다른 구간은 땅의 굴곡과 발굴 흔적으로만 남는다. 새 돌이 가지런한 곳을 백제 원형이라고 단정하지 말고 복원 범위와 재료를 안내판에서 확인한다. 반대로 눈에 띄는 구조물이 없다고 유적이 사라진 것도 아니다. 고고학은 성토층, 기초, 배수와 주변 유구를 통해 성곽의 위치와 축조 과정을 밝힌다. 사유지나 출입 제한 구간에 들어가 선을 억지로 따라가지 않고 공개된 탐방로를 이용해야 한다.
경계 밖을 함께 보아야 하는 이유
나성 위나 인접 길에서는 도성 중심만 바라보지 말고 왕릉원과 들, 규암 방향도 함께 본다. 수도는 성 안 주민만으로 유지되지 않고 성 밖의 농업 생산, 강 건너 나루와 길에 의존했다. 오늘의 부여읍 시가지가 백제 도성 경계와 정확히 겹치지는 않지만 도로를 걸으며 높낮이와 물길을 비교하면 옛 계획의 일부가 읽힌다. 비나 눈 뒤 흙길은 미끄럽고 여름에는 풀이 시야를 가릴 수 있다. 나성 여행의 목적은 완벽한 성벽 사진을 얻는 것이 아니라 사라진 수도의 크기와 안팎의 관계를 지형에서 복원해 보는 데 있다.
출발 전에 세계유산 지도의 전체 선을 확인하고 현장에서는 공개된 짧은 구간 하나를 천천히 보는 편이 무리하게 전 구간을 잇는 것보다 낫다. 성벽의 안쪽과 바깥쪽에서 각각 들판과 도심을 바라보면 경계가 사람과 물자의 왕래를 완전히 끊는 선은 아니었다는 사실도 드러난다.
구간마다 보존 상태가 다른 까닭을 살피는 과정 자체가 성곽 답사가 된다. 길이 불분명하면 되돌아가 공개 동선을 따른다.
눈에 보이는 높이보다 이어지는 지형을 읽는 일이 먼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