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2년 7월부터 1964년 7월까지, 당시 소록도 병원장이던 조창원(趙昌源)은 한센인들에게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간척사업에 나서면, 소록도를 떠나 육지에 새로운 정착촌을 만들어주겠다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격리된 삶을 살아온 한센인들에게 이는 육지에서 살 수 있다는 희망 그 자체였고, 많은 이들이 이 제안을 받아들여 소록도 북쪽 풍양반도에서 도양읍 봉암반도까지 2킬로미터가 넘는 바다를 메우는 노동에 나섰다. 3년에 걸친 이 노동의 결과로, 여의도 면적의 세 배에 이르는 간척지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공사는 방조제 침강과 익사사고, 예산 부족에 따른 임금 미지급, 기술 부족, 인근 주민 반발에 부딪혔다. 1964년 7월 25일 사업 주체가 전라남도로 넘어갔고, 같은 해 11월에는 한센병 회복자들을 이 땅에 정착시키지 않겠다는 결정이 알려졌다. 원생들은 사업 이관 경위를 밝혀 달라고 집권당에 청원했지만 답을 받지 못했다. 공사는 1988년에야 완공됐으며, 오마도는 당사자들이 노동으로 일군 땅에서 배제된 역사를 남겼다.
공식 박물관 자료는 매립 목표 1,070㏊, 방조제 3곳 총 2,753m, 정착 목표 1,500세대 약 2,500명으로 기록한다. 이는 계획값이지 실제 정착 성과가 아니다. ‘여의도 세 배’ 같은 비교는 여의도 면적의 기준과 시점에 따라 달라지므로 제목에서 빼고 공사 자체 수치를 쓴다. 공사 기간도 원생 참여가 집중된 1962~1964년과 전체 사업의 1988년 완공을 구분한다.
사업이 좌절된 원인을 총선거 하나로 설명할 근거는 부족하다. 방조제 침강, 익사사고, 예산과 기술 부족, 임금 미지급, 인근 주민 반발, 사업 주체 이관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정치적 이해가 없었다고 단정할 수도 없지만, 공식 자료가 확인하는 요인보다 앞세우지 않는다. ‘배신’은 약속과 노동 뒤 정착에서 배제된 당사자의 경험을 드러내는 해석어로 사용한다.
한센병 회복자들이 노동했다는 사실을 ‘맨손으로 바다를 막은 기적’처럼 낭만화하지 않는다. 병원과 정부의 권한, 임금과 안전, 선택 가능성, 익사 위험을 함께 봐야 한다. 1963년 국제워크캠프단 133명과 다른 정착촌 근로대도 공사에 참여했으므로 모든 방조제를 소록도 원생만 만들었다고 쓰지 않는다. 노동 주체를 존중하려면 참여 범위와 강제성의 조건을 정확히 남겨야 한다.
현재 오마도 간척지는 1988년 완공 뒤의 농지·도로·수리시설로 변화해 1960년대 공사 현장을 그대로 볼 수 없다. 대표 지점은 오마간척 한센인 추모공원으로 두며, 농업 생산 공간과 사유지를 침범하지 않는다. 소록도 박물관의 오마도 자료와 현장 추모 공간을 함께 보면 계획·노동·배제·후대 완공의 시간을 분리해 읽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