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itTrip NOW
← 이 동네 이야기 전체보기

정릉동 · 👑

광통교 아래 돌은 왜 정릉에서 왔을까

1화 · 도성 안 왕릉의 이장과 신덕왕후의 복권이 남긴 두 장소

성북구 정릉과 청계천 광통교는 멀리 떨어져 있지만 한 왕릉의 돌로 연결된다. 능이 옮겨진 이유와 왕비의 지위가 지워졌다 돌아온 과정을 함께 보아야 한다.

첫 정릉은 지금의 정동에 있었다

정릉은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두 번째 왕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이다. 신덕왕후가 1396년 세상을 떠나자 태조는 당시 도성 안, 오늘날 서울 중구 정동 일대에 능을 조성했다. 현재 성북구의 숲속 왕릉만 보면 처음부터 이 자리를 골랐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정동이라는 지명도 옛 정릉에서 비롯되었다. 태조가 신덕왕후의 아들을 왕위에 잇게 하려 했던 문제는 왕자의 난과 왕위 계승 갈등으로 이어졌다. 다만 왕실 가족의 감정을 단정하기보다, 능의 위치와 제도가 권력 재편 뒤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기록으로 읽는 편이 정확하다.

1409년 능은 도성 밖으로 옮겨졌다

태조가 세상을 떠난 뒤 태종은 1409년 도성 안에 능이 있는 것이 예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릉을 사을한 골짜기, 지금의 성북구 정릉동으로 옮겼다. 국가유산청 자료는 옛 능의 목재가 태평관 건축에, 병풍석과 난간석이 홍수로 무너진 청계천 광통교 보수에 쓰였다고 설명한다. 왕릉의 부재를 다른 공공시설에 재사용한 일은 단순한 이사가 아니었다. 신덕왕후를 종묘에서 제외하고 능을 낮춘 정치적 조치와 맞물렸다. 광통교 아래에서 보이는 조각석을 모두 임의로 '왕릉 돌'이라 부르지 말고, 공식 해설이 지정한 부재와 배치 방향을 확인해야 한다.

1669년에야 왕비의 지위와 제례가 회복되었다

신덕왕후는 오랫동안 태조의 왕비로 온전히 예우받지 못했다. 현종 때인 1669년 송시열 등의 건의 뒤 종묘에 신주를 모시는 부묘가 이루어졌고, 정릉도 왕릉 격식에 맞게 정비되었다. 현재의 정자각과 재실, 제향 체계는 1396년 최초 조성 때부터 아무 변화 없이 남은 것이 아니다. 비각의 표석도 조선시대 표기와 대한제국 때 황후로 추존한 표기가 함께 있어 신분과 국호가 바뀐 시간을 보여준다. 복권은 한 사람의 명예만 회복한 사건이 아니라 왕실 계보와 국가 의례를 다시 편성한 일이었다.

숲에서는 능선과 의례 동선을 함께 본다

정릉은 유네스코 세계유산 '조선왕릉'의 한 구성 요소이지만, 봉분 가까이 마음대로 올라가는 공원이 아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으로 이어지는 향로와 어로, 지형에 맞춰 꺾이는 접근축, 비각과 재실의 위치를 차례로 본다. 길이 꺾였다고 설계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연 지형을 의례 공간에 받아들인 결과이다. 제향이나 관리 작업이 있을 때는 동선을 양보하고 출입 제한을 따른다. 관람시간·휴무·해설은 바뀔 수 있으므로 국가유산청 궁능유적본부 안내를 당일 확인한다. 정릉에서 정동과 광통교까지 한 번에 걷는 코스는 아니지만, 지도에 세 지점을 표시하면 한 왕비의 기억이 지명·왕릉·다리 아래 석재로 흩어진 방식을 이해할 수 있다. 강남구 선정릉의 중종 능도 같은 발음으로 정릉이라 불리므로 검색 결과의 왕과 주소를 확인해야 한다. 성북구 정릉은 신덕왕후의 단릉이라는 구분이 길 찾기의 출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