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천역에서 관악산 방향으로 조금 걸으면 아파트와 학교 가까이에 큰 기와집이 나타난다. 온온사는 조선시대 과천현 객사의 중심 건물이다. 객사는 여행하는 관리의 숙소인 동시에 왕을 상징하는 패를 모시고 의례를 행한 지방 행정 공간이었다. 단순한 옛 여관이 아니다.
정조의 이동이 집의 이름을 바꿨다
과천시 공식 설명에 따르면 객사는 1649년 시작됐고 이후 건물이 더해졌다. 1790년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을 참배하러 가며 이곳에 머물렀다. 경치가 좋고 쉬기 편하다는 뜻으로 ‘온온사’라는 현판을 내렸다고 전한다. 한양에서 수원으로 가는 왕의 대규모 행렬이 과천을 통과했기에 이 작은 고을의 객사가 중요했다.
지금 보는 건물은 18세기 원형이 아니다
일제강점기에는 면사무소로 사용됐고 1932년 기존 건물이 헐리며 형태가 바뀌었다. 현재 건물은 1986년 해체·복원한 것이다. 옛 모습이 충분히 남지 않아 전남의 낙안객사 형태를 참고했다는 점을 과천시도 밝힌다. 복원은 거짓 유산이라는 뜻이 아니라 후대가 부족한 자료로 과거를 해석한 결과다.
남은 돌과 새 목재를 함께 본다
현판 이야기만 확인하고 돌아서지 말고 건물 앞의 초석과 석재, 복원 안내의 날짜를 살펴보자. 어느 부분이 옛터에서 왔고 어느 부분이 새로 구성됐는지 질문하면 문화유산을 ‘그대로 보존된 과거’로 소비하지 않게 된다. 정조의 능행은 왕의 효심뿐 아니라 많은 관리·군사·말·물자가 움직인 국가 행사였다는 점도 기억한다.
경내에서는 행사와 출입 통제 여부를 확인하고 목조건물에 기대거나 안쪽을 무단 촬영하지 않는다. 과천향교와 옛길 방향을 지도에 함께 놓으면 관아·객사·교육기관이 한 고을의 중심을 이뤘던 구조가 보인다. 온온사의 매력은 왕이 편히 쉬었다는 낭만적 일화보다, 왕의 이동과 식민지기의 훼손, 현대 복원이 같은 건물을 서로 다른 방식으로 소유했다는 데 있다.
외국인 방문자라면 객사가 사찰이 아니라 지방 행정과 왕실 의례를 담당한 건물이라는 점부터 이해하면 좋다. 온온사를 영어로 temple이라 부르면 기능을 잘못 전달하므로 royal guesthouse 또는 local government guesthouse에 가깝게 설명한다. 정조의 행차도 개인 여행이 아니라 수천 명과 물자가 움직인 정치적 행사였다. 건물의 연대와 복원 연대가 다르다는 사실은 매력을 깎는 흠이 아니라, 한국이 식민지기 훼손 뒤 문화유산을 다시 해석한 과정을 보여 주는 핵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