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읍성은 1437년 축성이 시작돼, 남문루인 정원루가 완성된 1469년(예종 1) 사이에 지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세종 때 전국적으로 이뤄진 연해 고을 읍성 축조 사업과 같은 흐름 속에 있었다. 바다에 면한 고을마다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성을 쌓던 시기였고, 국토 최남단에 위치한 해남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명당 자리에 자리 잡았다고 전해지는 이 읍성에서, 조선시대를 통틀어 192명의 현감이 배출됐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대부분이 문인이 아니라 무인 출신이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해남이 단순한 행정 고을이 아니라, 해안 방어의 최전선이라는 군사적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훗날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앞두고 조선 수군을 우수영으로 옮긴 것도, 이런 해남의 지리적·군사적 위상과 무관하지 않다. 평화로운 시절에는 눈에 띄지 않던 읍성의 존재가, 정유재란이라는 위기 앞에서 비로소 그 이유를 증명하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