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부터 지금과 같은 범위의 문화거리였음을 뜻하지 않는다. 1914년 행정구역을 정리하면서 한성부의 관인방에서 ‘인’, 대사동에서 ‘사’를 가져와 인사동이라는 지명을 만들었다고 전한다. 오늘날 관광객이 인사동이라 부르는 범위도 법정동 하나보다 넓어 관훈동·견지동·경운동·낙원동·공평동의 일부를 함께 포함한다.
도화서가 있었다고 화랑가가 그대로 이어진 것은 아니다
조선시대 이 일대에는 왕실과 국가의 그림 업무를 맡은 도화서가 있었다. 화원들은 어진과 의궤도, 지도와 기록화 등 국가에 필요한 이미지를 제작했다. 그러나 도화서에서 현대 화랑까지 하나의 상권이 중단 없이 이어졌다고 설명하면 과장이다. 관청의 제작 체계와 작품을 거래·전시하는 근대 미술시장은 기능과 고객이 달랐다.
신분질서의 해체는 오래된 물건을 시장으로 내보냈다
대한제국기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양반가의 경제 기반이 흔들리고 집안의 서화·도자기·가구와 책이 시장에 나왔다. 북촌과 가까운 인사동에 이를 중개하는 상점이 생겼고, 1930년대에는 고미술·골동품 거래가 눈에 띄게 모였다. ‘귀한 전통을 지킨 거리’라는 설명 뒤에는 생활비를 마련하려 물건을 팔아야 했던 가문의 해체와 식민지기 수집 시장도 있었다.
1960~1980년대에는 화랑과 공예 상권이 넓어졌다
전후 도시가 안정되면서 고서점·필방·표구점에 더해 현대미술 화랑과 공예품점이 늘었다. 작가는 전시할 공간을 얻고, 수집가는 작품을 보고, 표구사는 보존과 전시 형식을 완성했다. 인사동의 문화적 힘은 한 업종이 아니라 제작·감정·수선·전시·판매가 가까운 거리에서 연결된 데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