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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미사변과 기억의 정치 · 🏛️

장충단은 공원 이름이기 전에 국가가 만든 추모 제단이었다

‘장충’은 충성을 장려하고 기린다는 뜻이다. 1895년 10월 8일 일본인 낭인과 군인이 경복궁에 침입해 명성황후를 살해한 을미사변 때 궁내부대신 이경직, 시위대장 홍계훈과 여러 군인이 저항하다 목숨을 잃었다. 대한제국은 1900년 남소문이 있던 남산 동쪽 기슭에 제단과 부속 건물을 마련하고 이들을 국가 의례로 추모했다. 개인 묘소가 아니라 황제가 주관하는 제향 공간을 만든 것은 사건의 희생을 국가의 기억으로 편입하는 일이었다.

제단은 죽은 이들을 같은 방식으로 기억하지 않았다

장충단은 충신과 군인을 기리는 공간이었지만, 을미사변의 모든 피해와 당시 사회의 모든 목소리를 포괄한 것은 아니었다. 국가가 이름을 기록한 인물, 군대의 충성과 황실 방어가 중심에 놓였다. 장충단을 항일 기념물로만 단순화하기보다 대한제국이 위기 속에서 군주와 국가에 대한 충성을 어떻게 제도화했는지 함께 본다.

식민지 권력은 제향을 없애고 장소의 의미를 바꿨다

1910년 병합 뒤 일본 당국은 장충단 제향을 폐지하고 건물과 제단을 훼철했다. 1920년대 후반에는 벚나무와 공원 시설을 더해 장충단공원으로 바꾸었고, 인근에는 식민 통치와 일본인 공동체의 기념 시설이 들어왔다. 오늘 공원의 녹지를 오래된 자연이나 중립적인 휴식 공간으로만 보면, 추모 장소를 오락과 식민지 경관으로 바꾼 권력의 개입이 가려진다.

비석의 이동은 기억이 제자리로 돌아오지 못했음을 보여준다

장충단비는 식민지 시기에 철거되었다가 해방 뒤 다시 발견돼 현재 신라호텔이 있는 부근에 세워졌고,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앞면 글씨는 황태자 시절 순종이 썼으며 뒷면 143자의 글은 민영환이 지었다. 비석은 살아남았지만 원래 제단의 건축과 의례 동선은 사라졌다. 따라서 현재 위치를 ‘원형 그대로 보존된 장충단’이라 하지 않고, 흩어진 기억을 보여주는 남은 표지로 이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