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봉서원이 기리는 고봉 기대승은 조선 중기 성리학자로, 그의 학문적 명성은 한 편지 논쟁에서 비롯됐다. 당시 조선 최고의 학자로 꼽히던 퇴계 이황과 26살 연하의 기대승이 '사단칠정(四端七情)'을 둘러싸고 8년에 걸쳐 편지를 주고받으며 벌인 논쟁이다. 나이도, 명성도 한참 앞선 대학자에게 젊은 학자가 논리로 맞서며 오간 이 편지들은 훗날 조선 유학이 한층 철학적으로 심화되는 계기가 됐고, 뒤이은 율곡 이이의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평가를 받는다. 조선 시대 지식인 사회에서 이만큼 대등하게 오간 학문적 대화는 흔치 않았다.
서원의 역사도 이 논쟁만큼이나 굴곡졌다. 기대승 사후 7년 만인 1578년, 호남의 유생들이 그를 기리기 위해 지금의 광산 지역에 망천사라는 사당을 세운 것이 시작이다.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뒤 지금의 산월동으로 옮겼고, 1654년 효종이 '월봉'이라는 서원명을 내리면서 비로소 서원의 격식을 갖췄다. 하지만 1868년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아야 했고, 1941년에야 지금의 자리에 다시 지어졌다. 이후 1978년 사당과 강학 공간을, 1991년 지금의 전체 모습을 완성했다. 임진왜란과 철폐령이라는 두 차례 단절을 딛고 300년 넘게 명맥을 이어온 셈이다. 서원을 둘러싼 너브실마을은 한옥이 남아 있는 조용한 촌락으로, 최근에는 한옥스테이와 소규모 음악회 같은 프로그램이 시도되고 있다는 것이 확인되는 정도다. 이 부분은 아직 자료가 많지 않아 방문 전 최신 운영 정보를 따로 확인하는 편이 안전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