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량대첩 이후 이순신은 전열을 정비하기 위해 고하도로 진영을 옮겨 108일간 머물렀다. 좁은 목포 앞바다에 위치한 이 작은 섬은 수군을 재건하고 다음 전투를 준비하기에 적합한 지형이었다. 지금도 섬에는 이순신이 머물렀던 군영의 흔적과 이를 기리는 유적이 남아 있다.
그런데 같은 섬에는 전혀 다른 시대의 역사도 겹쳐 있다. 1904년, 목포 주재 일본영사 와카마쓰 토사부로(若松兎三郞)의 주도로 미국산 품종을 포함한 10여 종의 목화 씨앗이 이 섬에 시험 재배됐고, 결과가 좋아 고하도는 육지면(陸地棉) — 재래종이 아닌 개량 목화 품종 — 재배가 한반도에서 처음 성공한 곳으로 기록됐다. 이는 1910년 정식 병합보다 앞선 시점이지만, 이후 육지면 재배는 조선총독부의 식민지 면업 정책으로 이어져 1936년에는 목포공회당에서 '조선면업대회'가 열릴 만큼 조직적인 수탈 체계로 자리 잡았다. 조선의 마지막 항전을 준비했던 군사 요충지가, 300여 년 뒤에는 식민지 면업 정책의 출발점이 된 셈이다. 같은 땅이 시대에 따라 정반대의 역할을 맡았다는 사실은, 섬 하나의 역사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지금 고하도를 찾는 사람들은 대개 바다 위 120m 길이의 스카이워크를 걷기 위해서다. 유리 바닥 아래로 파도가 넘실대는 이 산책로는 목포에서 손꼽히는 인생샷 명소가 됐지만, 발밑의 섬이 품고 있는 두 겹의 역사를 알고 걸으면 풍경의 무게가 달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