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청계천을 보면 자연 계곡이 도시 한가운데 그대로 보존된 것처럼 느끼기 쉽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보통 ‘개천’이라 불렸고, 여러 산과 골짜기에서 내려온 물을 모아 동쪽 도성 밖으로 흘려보내는 도시 기반시설이었다. 비가 적을 때는 물이 얕았고 큰비가 오면 수위가 급격히 높아지는 계절성이 강한 하천이었다.
생활하수와 쓰레기도 하천으로 모였다
상하수도 체계가 분리되지 않은 도시에서 개천은 빗물뿐 아니라 집과 시장에서 나온 오수와 쓰레기를 함께 받았다. 다리 아래와 천변은 빨래, 물품 운반, 장사와 휴식의 장소였지만 악취와 오염, 침수 위험도 컸다. ‘맑은 옛 물길’이라는 향수만으로는 하천 가까이 살던 사람들의 환경을 설명할 수 없다.
준천은 하천 바닥을 파내는 대규모 도시사업이었다
퇴적된 흙과 폐기물이 물길을 막으면 홍수 피해가 커졌다. 조선 정부는 인력과 비용을 동원해 바닥을 파내고 제방을 정비하는 준천을 시행했다. 영조 시기 대규모 준천은 국가가 도성 주민과 노동력을 조직한 대표적인 사업이었다. 파낸 흙을 어디에 쌓고 누가 노동을 부담하는지도 중요한 행정 문제였다.
물길은 계층과 생활권의 경계이기도 했다
청계천 주변은 웃대·중촌·아랫대처럼 지형과 직업, 계층이 다른 생활권을 나누는 기준으로 사용됐다. 북촌과 남촌을 가르는 선이면서도 다리와 시장을 통해 사람을 연결했다. 하천을 도시의 가운데를 자른 빈 공간이 아니라 주민의 이동·노동·위생을 조직한 사회적 경계로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