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 다른 궁궐과 비교하면 덕수궁은 작고 건물 배치도 낯설다. 그 이유는 처음부터 왕궁으로 계획한 땅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곳은 성종의 형 월산대군 집안의 사저였고, 임진왜란으로 궁궐들이 불탄 뒤 선조가 1593년 서울로 돌아와 임시로 머물면서 ‘정릉동 행궁’이 되었다. 광해군 때 경운궁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오랫동안 중심 궁궐은 아니었다.
고종이 경운궁으로 돌아온 이유
1896년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했던 고종은 1897년 경운궁으로 돌아왔다. 같은 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바꾸고 황제 즉위식을 올렸다. 궁궐 동쪽에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제사를 지낸 것도 황제가 독립국의 군주임을 보이기 위한 의례였다. 경운궁은 이때부터 단순한 왕의 거처가 아니라 새 국가의 정치 무대가 되었다.
용과 봉황, 한옥과 석조전
중화전 답도와 천장에는 왕을 상징하는 봉황 대신 황제를 뜻하는 용이 나타난다. 조금 더 걸으면 1910년에 완공된 신고전주의 석조전이 나온다. 전통 목조건축과 서양식 석조건물이 한 담장 안에 나란히 있는 풍경은 취향의 혼합이 아니다. 황제의 정통성과 근대 국가의 외교 언어를 동시에 확보하려 한 선택이었다.
이름이 덕수궁으로 바뀐 뒤
1907년 강제로 퇴위한 고종이 이곳에 머물게 되면서 장수를 빈다는 뜻의 ‘덕수’라는 이름이 쓰이기 시작했다. 1919년 고종은 함녕전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죽음은 3·1운동이 확산되는 계기 중 하나가 됐다. 덕수궁을 볼 때는 아름다운 전각뿐 아니라, 황제국의 선언과 좌절이 같은 공간에 포개졌다는 점을 함께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