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한양이 양반과 평민으로만 나뉜 것은 아니다. 경복궁 서쪽 웃대에는 역관·의관·화원처럼 전문 지식과 기술로 관청에서 일한 중인이 많이 거주했다. 궁궐과 사역원, 관청에 접근하기 좋은 위치가 생활권 형성에 영향을 주었다.
기술은 필요했지만 신분에는 한계가 있었다
외국어 통역, 왕실 의료, 도화서의 그림은 국가 운영에 필수였다. 그러나 중인은 높은 관직으로 올라가는 데 제약을 받았다. 실무 능력과 사회적 지위가 일치하지 않는 긴장이 이들의 문화적 결속을 키웠다.
골목에서 시사가 열렸다
중인 문인들은 시를 짓고 비평하는 모임인 시사를 조직했다. 양반이 아닌 거리의 문학이라는 뜻에서 ‘위항문학’이라 부른다. 송석원시사처럼 인왕산 자락의 모임은 자연 풍경과 도시 생활을 함께 시에 담았다.
낭만화하지 않고 흔적을 찾는다
오늘날 특정 골목을 ‘중인 거리’로 그대로 복원해 볼 수는 없다. 대신 인왕산의 지형, 옛 물길, 화가와 문인의 집터를 연결하면 전문직 주민이 궁궐 바깥에서 만든 지식 네트워크가 보인다.